2004년 겨울에 감독이 워낙 유명한 분이라 별 망설임 없이 영화비를 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주말에도 텅텅 비어있던 부천 멀티관에도 사람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같이 본 영화입니다.
시작한 영화의 첫 장면,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의 모습입니다. 마을 사이로 증기기관차가 지나가고, 하늘에는 프로펠러 이상하게 돌아가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근대 초기 유럽 도시의 집과 사람들의 옷차림. 이 감독 애니의 특징 중 하나인, (배경이 일본 토속의 시공간이거나,) 이렇게 시대와 국적을 알 수 없는 인공의 시공간이라는 것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이 영화는 점점 낯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 감독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공감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유치하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한 해피엔딩은 저절로 눈쌀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약간 짜증났습니다.
'겨우 이런 영화가 거장이 말년에 만든 작품이란 말인가? 그동안 깊이 있는 주제가 탄탄한 스토리 속에 녹아 한 장면도 버릴 것이 없었던 영화들은 어디로 다 가버린 걸까?'
혹 제가 결정적으로 놓친 부분이 있나 하고, 첨으로 평론가들의 평을 찾아보게 되기도 했습니다(평소 영화평론가들의 글은 공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답니다). 평론가들의 평도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중간중간 의미 있는 대사와 장면이 나오지만 결국 스토리나 상징들과 엇박자를 이루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화해가 주제였던 그동안의 영화들과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이 주제였다는 말도 빼놓지 않더군요. 평론가들과 내생각이 다르지 않다는 것에 오히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2주가 지났습니다. 꺼림직한 마음에 오늘 다시 한번 찬찬히 영화를 되새김질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영화가 다른 눈으로 보이더군요.
이 애니는 몇 가지 기본 상징 장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글이 적나라하게 쓰면 다소 유치해지지만 그렇게 한번 써볼까 합니다.
'하울' = 마법사 = 애니 작가 = 감독 자신
움직이는 성 = 마법의 공간 = 애니의 세계 = 작품
소녀('소피') = 원래 아름다웠지만 황야의 마녀를 거부하다 늙은 모습 = 애니 주제 = 또 다른 작가 자신(생각)
황야의 마녀 = 다른 마법사 = 다른 애니 작가 = 다른 애니들(헐리웃 애니?)
왕실 마법사('설리먼') = 하울의 선생 = 애니 작가의 원형 = 애니의 조종자(또 다른 작가 자신)
불의 악마('캘시퍼') = 마법사(하울)의 심장으로 성을 움직이는 원동력 = 작가의 애니를 만들어간 원동력 = 작가의 심장(열정)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을 떠나 무서운 모습으로 전쟁을 막으려고 또다른 전쟁을 치루고 있는 하울과 성 안에서 아름답지 못하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외치는 하울이 이해됩니다.
마법의 힘을 얻고자 심장을 저당 잡힌 하울의 과거와 늙고 나니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서 좋다는 여주인공의 말, 앙상하게 부서진 '성'에서 여주인공을 통해 심장을 되찾는 하울,
심장을 준 하울과 서로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불의 악마가 심장을 하울에게 돌려주고 자유를 되찾은 후에도 기꺼이 하울과 동반하는 모습.
하울이 심장을 되찾았을 때, 황야의 마녀를 거부하다 늙어버린 소녀도 다시 젊어지고, 하울이 그토록 멈추고자 싸웠던 전쟁도 사라지고, 힘잃은 황야의 마녀조차도 자신의 성안에서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상황.
늙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때, 자신의 성이 모두 부서져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 막으려던 전쟁에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난 후에나 자신의 심장을 되찾을 수 있었던 하울은 60 넘은 작가 자신의 모습과 그 인생을 되돌아보는 반성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려 노력해 왔던 분이니까요.
결국 이 애니는 내가 본 그의 작품 중 가장 개인적이며, 가장 작가적이며, 가장 완숙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작가는 스토리와 재미를 버리고, 자신을 되찾은 듯합니다. 어른의 눈을 버리고 아이들의 눈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유치하다고 생각한 해피엔딩 결론은 결국 내 눈이 늙어버려서 생긴 착시 현상이었던 거죠.
물론 아닐 수 있겠죠. 그런지 아닌지 한 번 보세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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